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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되돌아 보며

가정방문에 관한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

 여러분들이 다녔던 학교에는 '가정방문'이라는 행사가 있었습니까? 저는 고향이 시골이라 매학년초에는 가정방문이라는 학교의 연례행사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지금의 부산으로 이사왔으니까 고향에서는 총 3번의 가정방문이 있었습니다.

 '가정방문'이란 어떤것인지 다 아시겠죠?? 담임 선생님이 자기반 아이들의 가정형편이 어떤지를 보고 학습지도 및 생활지도를 어떻게 해야겠다고 판별하는 아주 좋은 취지의 프로그램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가정방문에 관한 저의 기억은... 좋은 것나쁜 것으로 극명하게 갈립니다.

 우선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가정방문을 말씀드리자면,
 
 시골의 초등학교라서였을까요... 가정방문이 이루어지던 시기는 농촌에서 제일 바쁘던 모내기철이었습니다. 저희 학교는 대부분의 시골학교가 그러하듯이 학년마다 한 반씩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반에는 보통 20~30명 내외의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한 마을에 같은 반의 친구가 3~4명씩은 있었으니까 담임 선생님은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의 시간을 가정방문에 할애하셨습니다. 그렇게 마을마다 다니시면서 아이들의 집을 방문해서 부모님들과 이야기를 나누신 선생님은 곧장 모내기하는 논으로 달려가셔서 모내기를 도와주고 가셨습니다.

 고학년의 형과 누나들이 있었던 저희집은 이미 각 학년의 선생님들이 잘 알고 계셔서 가정형편을 보기보다는 "형과 누나들은 공부 잘 하는데 넌 왜이러냐"를 핀잔을 주시긴 했지만 싫지 않았습니다. 형과 누나들이 잘한다는 것이 어찌나 자랑스럽던지... ^^; 그렇게 부모님과 몇 마디를 나누신 후 모내기를 도와주시는 선생님이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간혹 새참으로 나온 동동주에 많이 취하셔서 횡설수설 했던 적도 있지만...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님들은 바쁘고 고된 일상때문에 철없는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애쓰시는 고마운 선생님을 알면서도 따로 찾아뵙지못합니다. 그래서 그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정방문이라는 작은 행사를 통해 선생님의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하는 마음으로 음식도 마련하는 등 마을의 큰 잔치였습니다.

 이렇게 '가정방문'이란 기분좋은 일이고 축제였던 것이 부산으로 와서 정말 몹쓸 것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2학기에 이곳 부산으로 전학을 왔습니다. 고향의 초등학교와는 비교할 수 조차없는 엄청난 수의 학생들. 각 학년마다 60여명씩 12반이 있는 것도 모자라 저학년의 경우엔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뉠 정도이니 반 아이들의 집을 다 찾아간다는 것은 애시당초에 무리였습니다. 그래서 전학온 후로 초등학교에서의 가정방문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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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저희 반 담임을 맡았던 L씨는 학기초에 가정방문을 한다는 날벼락(?)같은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전학왔던 초등학교에서도 없었던 가정방문을 이 중학교에서 한다니... 그때 당시 저희집 사정은...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기반도 없이 시골에서 부산으로 오신 부모님께서는 여전히 자리를 잡기 어려운 형편이었던 터라 조그만 가게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두 분 다 집에 계시지 않았고 달동네 두 칸짜리 집에 살았던 저는 집을 공개하는 것이 정말 싫었습니다. 그전에는 몰랐던 우리집의 가정형편이 머리가 굵어지고 사춘기가 되니까 정말 누군가에게 집을 공개하는 것이 꺼려졌습니다.  

 그렇게 L씨는 반 전체 아이들의 집을 방문한다는 것이 아니라고 했을때는 참 다행이구나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방문의 기준을 반의 1등~20등까지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제가 거기에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알고 다급해진 저는 L씨한테 저희집은 부모님께서 가게를 하셔서 집에 안계신다고 했더니,
 
 "자식의 교육보다 중요한게 어딨냐! 내일 갈테니까 와계시라고 말씀드려!!" 엄포와도 같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부모님께서는 "돈 달라고 오는거다..." 하시며 어두운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결국 다음날 L씨는 달동네의 방 두 칸짜리 집에 세들어 살던 저희집을 찾아왔습니다. 허름한 집에 와 앉아있는 L씨로부터 느껴지는 싸늘한 눈초리. 방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한채 쭈뼛쭈뼛 서있던 저는 보았습니다. 엄마가 꺼내시는 쌈짓돈 3만원. L씨는 한 번 거절하더니 바로 받아넣긴했는데 집을 보기 전의 표정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던 그 표정을 아직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설마 돈 받으려고 오겠어. 좋은 말씀해주시려는거겠지...'라고 생각했던 저의 기대는 돈을 집어넣는 L씨를 보면서 보기좋게 깨져버렸습니다.

 그렇게 푼돈을 받고 저희집을 나온 L씨는 저에게 별다른 말없이 돌아갔고, 다음날 학교에서 그는 저를 보았을때는 가정방문을 하기 전과는 아주 다른 태도로 저를 대했습니다. 그 후 L씨는 제가 조그만 잘못을 했을라치면 비꼬는 말투와 툭 내뱉는 말투 그리고 기분나쁜 체벌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제 짝에게는 저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짝이었던 반장에게는 정말 친절하고 그야말로 친구같은 선생님의 모습으로 대해주었습니다. 가정방문전에는 별차이가 없었는데... 그래서 전 반장에게 조심스레 물어보았습니다.

 "야, 너희 어머니는 얼마드리셨는데...?"
 "응... 30만원 줬다고 하더라..."

 30만원!!!!... 지금도 30만원은 적은 돈이 아닐진데 15년전쯤이면 어땠겠습니까... 그렇게 가정방문에 관한 저의 좋은 추억은 '가정방문=촌지받기'로 바뀌어버렸습니다. 그 L씨는 촌지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교실환경미화심사가 있을때면 늘 1~10등의 아이들에게 화분을 사오라고 시켰습니다. 환경미화심사에서 우승하려면 교실을 깨끗이 청소하고 애들이 사온 화분을 깔아두면 최우수상은 따놓은 당상이었습니다. 환경미화심사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면 얼마의 상금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제 역할을 다한 그 화분들은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이 되면 관리차원에서 자기집으로 다 가지고 갔습니다. L씨 집으로 간 화분들... 저희는 다시 볼 수가 없었습니다. L씨의 집으로 화분을 나르기 위해 동원되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집에 들어가봤던 제 친구녀석이 하는말,

 "완전 화원이다... 꽃집차려도 되겠다..."

 이후 사춘기였던 저는 큰 상처를 갖게 되었습니다. 힘들게 가정방문을 와서 어려운 가정형편의 자기 반 아이를 봤으면 따뜻하게 어루만져줄 생각은 하지않고 돈을 적게 주었다는 이유로 냉정하게 대했던 그 작자. 선생이란 허울좋은 가면을 쓴  그 L씨때문에 가정방문이란 참 좋은 것이라고 알았던 저의 소중한 추억들을 받은 돈에 의해 대우가 달라질 수도 있는 아주 나쁜 것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예전에는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청렴의 표상이자 존경의 대상이었던 선생님들이 이같은 극히 일부 몰지각한 날라리 선생들 때문에 욕을 먹게된다는 것은 정말 안타깝습니다...

 요즘 일부 학교에서는 축하받아야 할 스승의 날에 촌지문제가 불거질 것을 우려해 임시휴교를 한다고합니다.

 일선에서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애쓰고 계시는 선생님들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촌지...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받은 촌지의 액수가 많고 적음에 따라 사람을 차별대우는 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아마 저같은 사람에겐 좋은 기억마저 나쁜 것이 되어 평생 가슴아픈 기억으로 남게 될지도 모르니까요...